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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야화/우리는사랑일까

로맨티시스트가 되기 위해서_사랑에 관한 콤플렉스에 대한 이야기 2006

by 식인사과 2018. 10.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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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쓴지 10년이 된 글을 가끔씩 보다 보면 '내가 아닌 나'와 '나인 나'가 동시에 보인다. 나는 변하면서도 변하지 않았다. 이 글을 쓰던 그 당시 스물다섯살, 나는 과연 사랑의 본질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까. 사랑이 뭔지도 잘 몰랐을 그 시절에 사랑에 대한 콤플렉스에 대한 글을 쓴 것을 보면 그냥 나는 나의 아픔에 대해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이 글은 군대에서 새벽 근무를 할 때 컴퓨터를 이용해 쓴 것이다. 분명히 알고 있지만 마주보기 싫었던 나의 왜곡된 사랑관에 대해 어떻게든 기록을 남기고 싶었다. 어쩌면 위병소 내 새벽의 소슬한 달밤의 기운이 나의 손가락에 명령을 내린 것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글을 썼고 12년이 지난 지금 나는 결혼을 해서 제법 즐겁게 살고 있다. 


그 당시 가난과 사랑에 대한 글을 쓰면서 나의 과거를 돌아보면서 공허한 내면이 많이 채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글을 쓰지 않았다면 난 여전히 마음이 비어 있는지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지 않았을까. 이제 로맨티시스트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지만 사랑은 행복한 삶을 이루는데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쯤은 알게 된 것 같다. 그래서 지금의 삶을 오래오래 유지하고 싶다. 


그런데 나이 사십이 가까워지면서 또 다시 마음이 공허해지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콤플렉스나 트라우마 같은 왜곡된 형태는 아니지만 세월의 깊이가 더해진 만큼 공허함의 크기가 제법 깊다. 하나의 숙제를 풀면 인생이 조금 쉬워질 것 같았는데 이놈의 인생은 매번 숙제가 새로 생겨난다. 그래도 풀어야지. 풀자. 풀리라.



_ 로맨티시스트가 되기 위해서_사랑에 관한 콤플렉스에 대한 이야기 2006.4.9


내 어머니는 로맨티시스트다. 집 앞의 화단에 핀 작은 들꽃을 보면서도 감동을 받고 길거리 자판의 형형색색의 악세사리들을 보면서 예쁘다고 가던 길을 멈추고는 구경을 하신다. 이제는 연세가 많이 드셨지만 아직도 분위기 있는 카페에서 커피 한잔의 여유를 비록 그 대상이 남편에서 아들로 바뀌긴 했지만 여전히 꿈꾸고 계신다. 언젠가는 주말에 어머니와 함께 인사동 나들이를 간 적이 있다. 나야 원체 인사동을 좋아해서 자주 가기 때문에 별로 신기한 것도 없지만 어머니는 모처럼의 나들이에 기분이 좋으셨는지 이것 저것 구경하느라 이 쪽 골목에서 저 쪽 골목으로 걸어가는 데 1시간이 넘게 걸렸다. 근처 밥집에 들어가서 한정식에 대나무 통밥을 먹고는 잘 아는 전통 찻집에 들어가서 매화차를 먹으면서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고는 내게 두런두런 그 동안 못해왔던 이야기를 하시는 어머니는 내가 딱 원하는 로맨티시스트의 이상향이다.


그렇다. 난 로맨티시스트가 되고 싶다. 가슴 아픈 음악을 들으면서 가슴이 너무 아파서 병원에 실려 가보고 싶기도 하고 슬픈 영화를 보면서 한시간이고 두시간이고 펑펑 울 수 있는 그런 감수성을 가지고 싶다. 한 편의 좋은 시를 읽고 혼자 간직하기는 아까워 주위 사람들에게 시를 선물하는 문학청년이 되고 싶기도 하고 여자 친구 주려고 산 장미의 향에 내가 취해 가슴 속까지 아련해지는 가슴 여린 사람이 되고 싶기도 하다. 가슴 속이 너무 뜨거워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해 달려가는 용광로 같은 열정을 가지고 싶고 친구들과 밤새도록 술 한잔에 울고 불고 사랑과 우정을 논하면서 밤하늘의 시린 별빛을 마음 속에 담고 싶다.


그리고.. 신이 질투를 할 만큼 뜨거운 사랑을 하고 싶다.


어머니의 영향 때문인지 난 어렸을 적부터 로맨티시스트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막 자라나는 어린 로맨티시스트에게 콤플렉스까지 만들어 주면서 제동을 건 사람 역시 어머니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 당시는 나는 나대로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힘들었던 시기였던 것 같다. 평소 서로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어머니는 홀로 두 아들을 키워내야 했던 삶의 고달픔과 홀로 사는 외로움에 시달리며 나는 나대로 궁핍한 내 일상과 왠지 그것이 세상이 그렇게 만든 것 같다는 역시 궁핍한 착각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며 서로가 그런 일상의 일상이 견딜 수 없을 때가 되면 작은 말다툼으로 크고 작은 상처를 주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 때의 일이다. 어머니와 역시나 사소한 일을 계기로 말다툼을 하게 되었는데 어찌어찌하다가 고졸에 훤칠한 키에 조금은 잘생긴 얼굴을 가진, 미남계로 부잣집 딸내미를 꼬셔 결혼에 골인하고 나서는 부잣집 딸내미의 전 재산을 말아먹고 혈혈단신 저기 하늘에 계신 분과 맞장뜨러 가신 가난한 아버지 얘기가 나왔다. 아직도 그 때 난 왜 그런 얘기를 어머니에게 했는지 모르겠다. 난 멈출 수가 없었고 멈출 수 있었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차근차근 어머니와 얘기해 보고 싶은 것이기도 했다.


..

그럼 엄마, 아빠랑 결혼한 거 후회해? 변호사,검사,의사 다 제쳐두고 아빠랑 결혼한거 후회하냐구?

그래, 후회해. 그 때는 젊어서 몰랐지만 지금은 후회해.

.


난 아직도 이 말이 어머니의 진심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내 어머니는 로.맨.티.시.스.트.이기 때문이다. 단지 그 때의 상황이 "그랬고" 내 질문도 "그랬다"  그건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를 가지고 있는 로맨티시스트에게는 해서는 안될 질문이었고 나중에 당신이 나이가 들고 꼬부랑 할머니가 되었을 때 지나간 세월을 지그시 바라보며 두런두런 얘기했어야 할 아직은 덜 익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철이 든 로맨티시스트의 입에서 나온 이 말이 아직 철이 들지 않은 어린 로맨티시스트에게 사랑에 관한 콤플렉스를 남겼다는 것은 나중에야 알았다.


졸업을 하고 대학을 가고 자퇴를 하고 다시 학교 준비를 하던 스무살에 지방 연극제에 참여했다가 한 여자를 알게 됐는데 그녀는 나보다 여섯살이 많았다. 그 당시에 연상연하 커플이 유행하긴 했지만 그래서 만난 건 아니고 그냥 같이 있으면 좋았고 그녀도 나를 좋은 동생으로서 많이 좋아했다. 공연이 끝나고 뒤풀이가 끝나고 마지막 남은 몇몇 사람들끼리 여관방에 모여 마지막 밤을 지새우고 모두들 그 자리에서 골아떨어져서 꿈나라로 떠난 그 시간에 술병이 뒹굴고 사람들이 뒹굴고 있던 조금은 비현실적인 현실 속에서 나도 뒹굴거리다가 나와 같이 뒹굴거리던 그녀 옆에 눕게 되었다. 그 어수선한 자리에서 난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조그만 목소리로 고백을 했다.  


모두 알다시피 스무살에는 이렇다 할 경제적 능력이 없다. 더군다나 집안의 가세가 기울어진 나에겐 저렇다 할 경제적 능력도 없었다. 난 이 시대의 마지막 로맨티시스트로서 그녀에게 로맨틱한(?) '고백'으로 그녀에게 다가갔지만 그 이후가 문제였다. 그래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녀의 친구들은 적어도 내겐 다 큰 어른이었고 난 스무살의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조금 열심히 일했다. 일주일에 한 두번 그녀의 얼굴을 보곤 했지만 난 행복했고 그녀도 행복했다고 생각한다. 난 스물 여섯 그녀 인생에서 처음으로 말을 논 어리숙한 스무살 남자였고 그녀는 내 어리숙한 스무살을 가장 아름답게 해준 스물 여섯 여자였으니까. 당신 달링 허니 꿀물 하면서 주위의 걱정과는 달리 꽤 알콩달콩한 사랑을 했다. 


사랑의 묘약에 취해 정신없이 반년이란 시간에 지나고 학교에 들어갈 무렵 난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해 오는 걸 느꼈다. 불안감의 정체를 곰곰히 생각해보니 학교에 들어가면 아르바이트도 못하고 설령 하게 되더라도 모두 학비에 쏟아야 하는 내 경제적 능력은 저렇다 할 능력은 커녕 제로가 되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그게 뭐 어때서? 사랑하는데 돈이 무슨 걱정이야. 로맨티시스트는 그런 걸 걱정하지 않는다구.. 라고 호기있게 아니 조금은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큰소리를 쳤지만 그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더니 나중에는 모기 목소리만해져버렸고 결국엔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난 그녀와 헤어졌다. 


헤어지고 나서는 단순히 주인공들이 연상연하 커플이라는 이유만으로 보게 된 유치찬란한 로망스를 첫회부터 마지막회까지 보면서 펑펑 울었고 슬픈 눈을 한 전지현이 젊은 날에 라면만 먹고 사랑을 나눈다는 것은 슬픈 일이라는 대사를 날리며 가난한 조인성의 마음을 아프게 한 2% 음료수의 광고를 보며 내 마음도 찢어지듯이 아팠고 후속작으로 나온 2탄에서 똑같이 슬픈 눈을 한 전지현이 나와 이수일의 순수한 사랑도 김중배의 다이아몬드도 심순애에게는 똑같은 사랑이다 라고 대사를 날리며 지진희의 마음을 아프게 했을 때는 찢어진 가슴 속에서 나온 피가 어느 정도 굳어 상처가 아물어 가던 상처가 덧나 다시 오랜 기간동안 가슴앓이를 해야했다. 


그렇게 일년동안 가슴앓이를 하다가 난 궁금해졌다. 왜 그녀와 헤어졌을까. 내가 돈이 없어서? 그게 부끄러워서? 그녀가 가난한 나를 싫어하기라도 했나? 생각해보니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속세에 물들지 않은 사람이었고 돈 때문에 순수한 사랑을 버리는 심순애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그 순간 기억의 저 끄트머리에서 알싸한 기억들이 타고 올라와 내 온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었다. 정확히 어머니가 내게 한 말에 대한 기억이었다. 속세에 물들지 않은 사람이었고 돈 때문에 순수한 사랑을 버리는 심순애가 아니었던 로맨티시스트 우리 어머니가 지난 날에 보이지 않은 비수로 내 심장에 꽂은 그 말.. 


그래, 후회해. 그 때는 젊어서 몰랐지만 지금은 후회해.


 그랬던가. 나에겐 치명적인 병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내 몸 속에 잠재해 있다가 그녀를 통해 존재를 드러낸 것이다. 어쩌면 불치병이 될지 모르는 이 병을 고치지 못하면 평생 사랑이란 건 구경조차 못하겠다 싶었다. 아니 사랑을 해서는 안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난 이 병을 고치기 전에는 사랑을 하지 않겠다고 내 자신에게 맹세했다. 다시는 내 병으로 인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 안되겠다고..

..

.

우습게도 난 아직도 사랑에 관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보통은 그 심리적 원인을 알고 나면 서서히 극복이 된다고 하는데 원인을 밝혀낸지 5년 가까이 시간이 흘렀건만 나에겐 여전히 극복하지 못한 미궁의 과제로 남아 있다. 그래서 사랑이란 것이 찾아올 때마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미궁 속으로 빠져 들어 출구를 찾지 못해 허덕이고 애써 사랑의 외면하고 나면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한 것이 나도 모르게 외로워지는 것이다. 마음 한 구석이 텅 비어 가면서 내 몸이 점점 사라져 가는 느낌. 이러다가 사랑이란 감정이 아얘 메말라 버리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면서도 나의 사랑 콤플렉스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리고..


아직도 난 내 스무살을 가장 아름답게 해준 그녀를 사랑한다.


                                                                                                                                                   20070212

얼마 전 김형경을 소설을 읽고 나서는 내 러브컴플렉스의 내면을 좀 더 깊숙히 바라볼 수 있었다. 그리고 작년 말이었던가 이십오년만에 처음으로 형과 술자리를 하면서 형도 나와 똑같은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알게됐다. 속세에 물들지 않은, 돈 때문에 순수한 사랑을 버리는 심순애가 아닌 로맨티스트도 결국 가난함을 참지 못할 거라는 내 콤플렉스의 단단한 외벽 한 구석을 허물고 안에 들어가보니 그 곳엔 결국 사랑하는 연인을 앞에 두고 아버지처럼 될까봐 무서워하고 있는 또 다른 내가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있었다. 결국 모든 문제의 시작과 끝은 타인이 아닌 나에게 있었다는 단순히 사실을 확인하고 나니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졌다.


아직까지도 난 내 러브컴플렉스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오랫동안 메말라 쩍쩍 금이 가있던 내 마음에 촉촉하게 물을 주며 내 가난함을 받아주고 내 변덕을 참아주며 내 어리숙함을 말없이 지켜보며 기다려주는, 그리고 치유될 것 같지 않은 내 마음의 상처에 빨간약을 발라주고 대일밴드를 붙여주며 상처를 따뜻하게 감싸앉아주는 현명한 연인이 내 곁에 있어 이천칠년 겨울이 난 몹시 행복하다.


그래서 지금은 조금 오래 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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