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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만 일해야지 생각했던 대안학교 공간에서 8년이란 시간을 보냈다. 첫 직장이었고 첫 결혼을 이 곳에서 했으며 어쩌면 (대학을 졸업한 이후) 첫 동료도 이 곳에서 생겼을 것이다. 생각보다 많은 청소년들을 만났고 학부모들과 진지한 대화를 했으며 많은 동료들과 긴긴 밤을 벗삼아 대한민국 교육에 대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토론을 하기도 했다. 지난한 과정도 있었고 알뜰했던 순간도 있었다. 다행인 것은 그 과정 속에서 나 역시 무수히 많은 점들을 이어가며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 억울하고 힘들고 좌절하는 과정 속에서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도 수없이 하고 지금도 하고 있지만 어쨌든 그 시간을 버티어 냈기에 할 수 있는 것들이 있었고 그런 부분들이 날 성장하게 했던 것 같다.
회의를 회의적으로 길게 하다보면 회의감만 늘다가도 그런 순간마다 갑자기 찾아오는 해결책들을 보면서 깜짝 놀라곤 한다. 대안학교에 진행하는 모든 과정이 그런 것 같다. 게다가 내가 일하고 있는 대안학교는 강력한 리더십이 있는 몇명에 의해 굴러가는 곳도 아니고 조직 체계도 그렇지 않다. 학생들의 일이나 어른들의 일이나 무엇 하나 결정하고 실행하려면 최소 반년에서 일년이 걸린다. 십 년이란 시간 동안 이런 합의제 문화가 답답했을 법도 한데 우직하게 이런 방식을 밀고 나갔다. 그래서 불편하지만 교육의 건강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올해 초 진행한 교육토론회는 3차 교육과정을 준비하는 과정 속에서 기획이 되었다. 3차 교육과정 개편 진행과정에 대해 학부모들과 의견을 나누던 중 졸업생, 재학생들과 함께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의견을 주셨고 학생들의 동의를 얻어 각 단위의 TF팀을 구성해 세 달 가량 토론회를 준비했다. 재학생들은 TF 회의, 학년 회의, 전체 회의, 공청회 등 총 12차례에 걸쳐 학생들의 의견을 모았고 2차 교육과정에 대한 개선 방향에 대해 총 18가지의 의견을 모아서 문서로 제출했다. 학부모들 역시 TF팀을 조직해 학년별 의견을 수렴해 '기초와 심화'라는 키워드로 의견을 제시했다.
졸업생은 미리 준비하라고 팀을 조성해서 온라인으로 의견을 모으기로 했지만 토론회 당일 그냥 그 동안의 경험으로 자연스럽게 말하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다. 시작 전에는 조금 불안했지만 그들이 그동안 쌓은 경험을 믿었기에 그냥 진행했는데 결론만 놓고 보면 이 친구들이 자기 주관대로 말을 제일 잘했던 것 같다. 이 과정에서 교사는 균형을 잡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하는데 이 부분이 가장 어렵다. 부모들과 학생들의 의견은 하늘과 땅만큼 그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이다. 그냥 서로 다른 우주에 있는 존재라고나 할까.
토론회 준비를 위해 충북 제천으로 내려가 3박 4일 워크샵을 했다. 일어나서 회의하고 밥 먹고 회의하고 밥 먹고 회의하고 술 먹고 토론하다가 자는 것을 세 번 반복하니 그래도 제법 균형 잡힌 토론회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잘 될 것이라는 희망보다는 최선을 다해야한다는 절박함이 있었던 것 같다.
여차저차 학생, 학부모, 교사 모든 단위가 모여 각자 발제를 하고 토론을 했다. 부모들 앞에서 쩔쩔 맬 것이라고 예상했던 재학생들은 초조해하지 않고 자기 생각을 알뜰하게 정리해서 말하는 당당함을 보여주었다. 학부모들도 나름대로 정돈된 언어로 그 동안 교육과정에 대해 아쉬웠던 내용들을 제시했다. 교사들은 이 시점에 와서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할 대안교육이란 무엇인가, 배움터길의 교육 철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화두를 제시했다. 졸업생들은 '공부를 하지 않은' 아이의 장래에 대해 불안해하는 어른들에게 대안학교 교육이 개념적 지식은 다소 부족할 수 있어도 경험적 지식은 풍부하니 아이들을 믿어주고 기다려주면 언젠가 그 내공이 발현될 것이라고 제법 멋진 멘트로 토론회 엔딩을 훈훈하게 만들어주었다.
매년 진행하는 입학 설명회 때 학교가 궁금해서 찾아오는 많은 학부모들에게 열심히 교육과정에 대해 설명하는 시간이 있다. 그렇게 설명하고 나서 질의응답 시간이 되면 공통적으로 나오는 질문이 꼭 하나 있다. "다 좋은데 공부는 언제 해요?" 삶과 유리된 대한민국 교육에 회의를 품고 대안교육을 찾아왔지만 정작 어떤 부분이 유리되어 있는지 알지 못하는 이런 질문을 매년 듣다보면 교육 운동을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과 내가 이걸 왜 하지 라는 회의감이 동시에 찾아온다.
공부란 무엇일까- 누구나 할 수 있는 질문이지만 어느 누구도 명쾌한 답변을 내릴 수도 없는 질문이다. 이번 교육 토론회를 통해 내 스스로 되묻는 과정이 여러번 있었지만 그 때마다 어떤 답도 확신을 가지고 내리기가 어려웠다. 다만 대안교육은 이런 질문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답변하는 과정의 연속이라는 것은 알게 되었다. 그래서 힘들지만 그래서 즐겁다.
학교는 보물지도와 같다. 보물지도를 가지고만 있으면 어떤 보물도 찾을 수 없다. 보물을 찾는 것은 보물지도가 아니라 보물지도를 가지고 있는 탐험가의 끝없는 호기심과 도전 정신이다. 누군가가 보물지도를 보고 보물을 찾아서 탐험가에게 전달해준다면 그것은 이미 보물이 아니다. 보물의 가치는 남이 찾아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찾을 때 비로소 빛을 발한다.
난 아이들이 교육을 통해 자기만의 보물을 찾았으면 좋겠다. 그래야 행복해질 수 있으니까.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대한민국 청소년 모두가 행복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날이 하루 빨리 올 수 있기를. 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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