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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일하고 있는 대안학교에서는 학교 급식을 학년마다 일주일에 한 번씩 학생들이 준비한다. '소박한 밥상(이하 소밥)'이라는 수업으로 급식을 진행하고 있는데 소밥 선생님들이 오셔서 재료 손질부터 뒷설거지까지 지도를 해주시고 있고 대략 4시간 정도 되는 요리 수업이라고 보면 된다. 소밥 수업 5년을 들어도 TV 예능에 나오는 셰프처럼 블링블링한 요리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음식 재료만 있으면 레시피를 보고 웬만한 음식은 해먹을 줄 알게 되는 것 같다.
소박한 밥상은 수업의 형태를 띠고 있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급식이기도 하기 때문에 요리 학원에서 하는 쿠킹클래스처럼 우아하게 수업을 진행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요즘에는 집에서 아이들에게 요리는 커녕 집에서 설거지도 시키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보니 처음 학교에 입학하고 1-2년차인 작은나무(중1), 가온나무(중2) 수업은 그야말로 전쟁터에 가깝다. 이런 상황에서 60여명의 음식을 매일 준비해야 하고 맛의 균형도 잡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이 수업을 진행해주시는 소밥 선생님들께 항상 감사의 마음을 가지게 된다.
작년까지 '소밥경연대회'라는 이름으로 일 년에 한 번씩 학년 요리 대회를 열었다. 처음 시작할 때는 분위기가 좋았지만 해가 거듭될수록 음식 나눔이라는 초기의 취지를 벗어나 점점 경쟁이 과열되는 분위기가 강해지면서 올해는 소밥경연대회 대신 일년에 한 번 부모님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고소한 밥상(고맙고 소중한 밥상) 프로그램으로 변경했다.
내가 올해 맡은 학년은 졸업반인 대숲 과정인데 5년 동안 소밥 수업을 듣다보니 요리 내공이 상당하다. 고소한 밥상은 내가 하고 싶은 요리보다 대접에 더 초점이 있기 때문에 메뉴는 부모님들의 음식 취향을 고려해 한식으로 결정했다. 대숲 친구들의 기수가 8기라서 라임을 맞춰 당일 밥상 콘셉트를 '조선팔기 팔첩반상'으로 정했다.
사실 한식 반상에 있어서 '팔첩'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밥, 국, 김치를 기본으로 각종 반찬을 곁들인 밥상을 '반상'이라고 하는데 보통 3첩, 5첩, 7첩, 9첩 홀수 단위로 반찬을 놓고 궁중상에 한해서만 12첩까지 놀 수 있다고 한다. 민가에서는 9첩까지 제한을 두었다고 하는데 조선 시대의 계급 문화를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소밥 수업 때 소밥 선생님과 한 번 연습을 해보더니 고소한 밥상 때에는 순도 100% 자기들끼리 요리를 했다. 선생님 없이 진행하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라고 생각해서 부모님이 오시기 전 3시간 전에 모였는데 한 시간만에 모든 요리를 뚝딱 만들어서 깜짝 놀랐다. 자기들도 이렇게 빨리 만들 줄 몰랐는지 나보다 더 놀랐던 것 같다.
인근 문구점에서 예쁜 한지를 구비해서 책상 위에 깔고 반찬 별로 세팅을 하니 세팅 만으로도 먹음직스러웠다. 음악도 전통 음악을 틀어놓으려고 했지만 생각보다 잘 어울리지 않아서 고전 클래식 음악을 틀어놓았는데 잘 어울렸던 것 같다.
무엇보다 음식이 매우 맛있었다. 8기 역시 작은나무, 가온나무 시절 소밥 수업을 들을 때마다 전쟁터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던 친구들인데 5년이 지난 후 이렇게 맛있게 한 상 음식을 차리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한식이 보기에는 쉬어 보여도 간을 맞춰서 맛있게 만들기가 생각보다 어려운데 이 날 음식은 정말 맛있었다.
결과만 놓고 보면 금방 나온 것처럼 보이지만 한식으로 콘셉트를 정하고 학년회의를 통해 메뉴를 정하고 연습을 해보기까지 준비기간만 한 달이 넘게 걸렸다. 각자의 취향이 다르다보니 반찬을 정하는데 가장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 번 회의를 할 때마다 기본 한 시간씩 논의를 하면서 반찬 메뉴를 정했다. 하고 싶은 것들이 많은 친구들이라서 중간에 의견 조율하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그렇게 치열하게 논의를 한 만큼 음식 퀼리티도 높게 나온 것 같다.
올해 고소한 밥상을 하면서 가장 좋았던 점은 부모님들의 긍정적인 반응이다. 매일 음식을 제공하던 입장에서 자녀에게 직접 음식 대접을 받는 경험이 생각보다 좋으셨던 것 같다. 대부분 소박한 밥상 수업을 통해 급식을 한다는 것만 알았지 학생들이 어느 정도로 음식을 할 수 있는지 모르신 분들이 많았는데 이번 고소한 밥상 프로그램을 계기로 소박한 밥상 수업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서 많이 알려드릴 수 있어서 나도 기분이 좋았다.
사실 나조차도 이 곳에서 일하기 전까지 음식은 언제나 누군가가 해주거나 사먹는 대상이었지 스스로 해먹는다는 생각을 제대로 해 본적이 없다. 아마도 나를 포함하여 대한민국 20-30대 청년들 대부분이 비슷한 사고를 가지고 있지 않을까. 하지만 여행이나 소밥 등 학교 수업을 통해 요리를 접하게 된지 이제 10년 가까이 되면서 밥을 먹는다는 행위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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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는 빠르게 해먹을 수 있는 반조리 제품도 많고 어떤 음식점에 가도 10분 이내에 음식이 나오기 때문에 하나의 음식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나오게 되는지 알기가 어렵다. TV에서는 각종 먹방 프로그램이 즐비하면서 한번도 요리를 제대로 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마치 자기도 요리 전문가가 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하지만 모든 분야가 으레 그렇듯이 요리 역시 재료손질부터 뒷설거지까지 하나의 싸이클을 직접 해봐야 그 재미와 의미를 함께 알 수 있다. 요리는 즐거운 노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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