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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관객/잃어버린연극

[민들레] 생활의 달인, 그들이 예술가다.

by 식인사과 2013. 1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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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달인, 그들이 예술가다

 

각양각색의 달인들.

 

‘생활의 달인’은 2005년 SBS에서 처음 시작하여 지금까지 방송되고 있는 대표적인 장수 프로그램인데, 내가 군대에서 채널을 마음대로 돌려볼 수 있는 고참 때 즐겨보던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당시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 나오는 늘씬한 각선미를 자랑하는 미녀 연예인들을 보고 싶었던 후임들에게 이런 고참의 악취미가 그리 반갑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후임들의 따가운 시선까지 감수하면서 이 프로그램을 계속 본 이유는 영상 속에 담긴 수많은 생활의 달인들의 모습이 내가 연극을 공부하면서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연기의 본질과 어딘가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생활의 달인’은 수십 년간 한 분야에 종사하여 열정과 노력으로 달인의 경지에 이른 사람들의 삶과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프로그램이다. 지금 최고의 예능 스타로 종횡무진 활약하는 김병만 씨도 이 프로그램을 벤치마킹한 개콘의 ‘달인’ 시리즈로 유명세를 얻었다. 이 프로그램에 나오는 달인이 일하고 있는 분야는 각양각색, 천차만별이다. 백화점 카트만 8년 동안 나르는 달인, 어시장에서 생선 박스만 20년 째 만드는 달인, 12년 동안 생선 굽기만 한 달인 등 이미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이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달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마치 신내림 받은 것처럼 신속하고 정확하게 처리한다. 자신의 분야에서 단 한 치의 실수도 허용하지 않는 달인들의 손놀림은 마치 올림픽 대표 선수가 경기에서 보여주는 기술들처럼 정교하고 예리하다.

 

 

 

배우를 닮은 사람들.

 

프로그램을 처음 볼 때만 해도 마냥 신기해서 넋 놓고 바라보기만 했는데 보면 볼수록 이들의 행동에서 공통된 특징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특징들은 내가 연기에 대한 각종 이론서를 보면서 이해되지 않는 부분, 또는 머릿속에서는 이해가 되었지만 구체적인 설명이 불가능했던 부분들에 대한 답을 제시해주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배우와 가장 연관이 없을 것 같은 달인들의 모습 속에서 나는 배우에게 가장 필요한 요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

 

첫 번째, 달인의 움직임 속에는 불필요하고 비생산적인 동작이 없다. 가장 효율적이고 경제적인 몇 번의 몸동작으로 자신의 일을 처리한다.

 

두 번째, 달인의 움직임에는 리듬감이 있다. 이 분들의 리드미컬한 움직임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오랜 동안 훈련에 훈련을 거듭한 무용수의 환상적인 몸짓을 보는 것처럼 황홀함까지 느껴진다. 

 

세 번째, 자신의 일에 가장 적합한 신체의 중심이 어디인지를 안다. 그래서 같은 움직임을 몇 시간동안 반복해도 힘이 들어가지 않으며 안정적이다. 그것은 마치 삼각형의 무게 중심을 찾는 것과 비슷한 것인데 삼각형의 모양마다 무게 중심이 다르듯이 일하는 사람의 무게 중심은 몸의 형태에 따라 하는 일에 따라 모두 다르다. 그것을 찾아내고 본인에게 익숙하게 만들어냈다는 것은 오랜 시간 반복된 훈련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 세 가지 특징, 군더더기 없는 동작, 규칙적인 리듬감, 올바른 신체 중심은 달인에게 무한한 체력을 제공한다. 이것은 힘이 강해진다는 것이 아니라 힘을 제대로 분배할 줄 안다는 뜻이다. 힘을 분배할 줄 알기에 다른 사람보다 적은 힘으로 더 많은 일들을 수행할 수 있다.
 
이 모든 특징들을 압축해서 하나의 단어로 표현하면 바로 ‘몸의 이완’이다. 즉, 달인의 몸은 일을 하는 순간에 완벽하게 이완되어 있기에 불필요한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는다. 그래서 이들의 움직임은 마치 깃털처럼 가볍게 몸을 놀리는 무용수같이 역동적이고 아름다우며 단순하면서도 정확하다. 몇 십년간 반복적인 동작을 통해 얻은 달인만의 특징이 ‘몸의 근력’이 아닌 ‘몸의 이완’에 있다는 것은 재미있는 부분이다. 그것은 몸을 단련시키는 방법이라기보다는 몸의 이해하는 과정에 더 가깝다.

 

몸의 이완이란 몸에 힘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힘이 ‘풀어진’ 상태를 뜻한다. 배우는 무대 위에서 어떤 자극이 들어와도 자연스럽게 반응할 수 있는 이런 이완된 신체가 필요하지만 대부분의 배우들은 몸을 이완시키는 훈련 이전에 화술 연습에 더 집중을 한다. 하지만 준비되지 않은 신체는 무대 위의 다양한 자극에 몸이 저절로 경직되고 결국 어색한 연기를 하게 만든다. 스튜디오 명함 사진은 어색한데 반해 스냅 사진이 자연스러운 까닭은 사진을 찍는 순간 우리 몸이 가장 자연스런 상태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꼭 배우에게만 적용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위대한 예술가들이 작업을 할 때는 신체가 완벽히 이완되어 있다. 화가가 그림 그리기에 몰입해 있거나 뛰어난 연주가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을 보면 그들이 그 순간 완벽하게 신체를 이완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 20년 쭉 하니 저절로 되더라.

 

달인이 몸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단지 신체적인 부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달인들만의 또 다른 공통된 특징은 그 비결을 묻는 리포터의 질문에 대답이 한결 같다는 것이다. “한 20년 쭉 하니 저절로 되더라” 힘든 일을 하면서도 싱글벙글 웃으며 이런 말을 툭 내뱉는 달인들을 보면 삶의 내공이란 갑작스럽게 로또에 당첨되는 것처럼 한 번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오랜 세월동안 묵묵히 자기의 일을 해왔던 이들의 삶을 지켜보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작은 깨달음을 준다. 몸의 무게 중심을 바탕으로 자신의 삶의 무게 중심까지 찾아낸 달인들의 모습은 이제 갓 5년차에 접어들면서 매너리즘에 빠져 징징대는 나에게 새로운 자극이 되기도 한다. 내가 주변 환경을 탓하며 징징대는 이유는 결국 내가 삶의 무게 중심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삶의 무게 중심을 찾아내는 그 순간 나의 삶은 굉장히 명료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선생 노릇 이십 년쯤 하면 생활의 달인처럼 말하게 되는 날이 올까. 하루가 다르게 생각과 감정이 변하는 청소년 친구들을 만나고 대화하면서 내 삶의 무게 중심을 찾는 것은 분명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언젠가 내 삶의 무게 중심이 잡힐 때가 온다면, 그 중심에는 이 친구들이 함께 할 것 같다.

 

 

 

자기소개

허실 | 더불어가는배움터길 길잡이 교사. 학교에서의 별명은 '허실'- '허허실실'의 준말이지만 아이들은 '허술하고 부실한'의 준말쯤으로 안다고. vavo@liv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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