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천일야화/자전거도둑

열정페이, 그리고 가치페이

by 식인사과 2015. 1. 24.
반응형

 

 

 

`

열정페이란 말이 유행이다. 열심히 일할 거리를 제공할 테니 돈 달라고 징징대지 말고 닥치고 열심히 일하라는, 그러면서 열정만 쏙 빼먹고 일정 기간 이후에 바로 팽해버리는 일부 기업의 갑질 횡포를 두고 하는 말이라고 한다. 열정페이란 말이 유행하기 전에는 이런 문화를 당연시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애궂은 청춘들만 열정이 부족하고 돈만 생각하는 철부지처럼 인식되곤 했다. 지금의 최저 임금의 반도 되지 않았던 시기에 첫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던 나에게 이런 인식은 아직까지 상당히 불편하게 다가온다.

 

열정페이를 열정페이라고 부르지 못하던 시절, 나 역시 적은 임금이라도 경험을 쌓을 수 있는게 어디냐며 말도 안되는 페이를 받으며 '즐겁게' 일하던 시절이 있었다. 대학을 수시로 붙은 후 지역예술축제에서 4개월 단기 프로젝트 공연팀에 참여한 적이 있었는데 4개월 동안 받은 페이는 단돈 30만원이었다. 그 당시 그 페이에 대해 울분을 토하던 선배들의 모습을 보며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삼시세끼 꼬박 먹여주고 난타, 풍물, 연기 등 다양한 공연 스킬을 가르쳐 주는데 돈까지 준다니 나에게는 큰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멍청한 생각이었지만 열정페이란 개념이 없던 그 시절, 이제 갓 성인이 된 청춘에게는 당연한 생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

졸업 후 대안학교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여러 다양한 경험을 통해 이제 7년차 교사가 되었고 올해는 대표교사가 되었다. 그리고 새롭게 인식하게 된 점 하나는 대안학교 교사의 근무 연차가 생각보다 길지 않다는 점이었다. 외국의 대안학교의 경우 꼬부랑 할머니 교사도 꽤 많다고 하던데 우리는 그럴 수 없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부분은 대안학교 뿐만이 아니라 소위 진보 진영이라고 불리는 다양한 시민단체의 경우도 비슷했다. 좋은 가치를 위해 모인 사람들의 단체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오래 일할 수 없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열정페이란 말은 이 곳에서 존재하지는 않는다. 좋은 가치를 위해 모인 만큼 그런 몰상식한 일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단체의 철학에 위배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 철학을 지키기 위한 가치페이란 것은 암묵적으로 존재하는 것 같다. (여기서 '같다'라고 말하는 것은 내 짧은 경험 근거한, 공식적인 자료에 근거하지 않은 추측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같이 천박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좋은 가치를 위해 모였다는 것은 '돈을 벌기 힘들다' 라는 말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실제로 대안학교든 시민단체든 재정적인 압박이 많고 그것은 곧 근무자의 낮은 페이와 열악한 복지로 이어진다. 좋은 가치를 위해 모였는데 좋은 가치를 실현하려는 노동자에게 좋은 노동환경을 제공해주지 못하는 것은 참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가치페이가 존재한다. '좋은 가치를 위해서 모인 만큼 적은 월급이라도 참고 견뎌줘. 우리는 공동체잖아'

 

좋은 노동 환경이란 '일의 의미'와 '삶의 질'이 균형을 이루며 노동자가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것을 뜻한다. 돈이 부족한 것은 소비의 문제이지 벌이의 문제가 아니다. 한 달에 500만원 버는 사람보다 200만원 버는 사람이 더 행복할 수 있고 풍족할 수 있다. 페이만 오른다고  노동 환경이 좋아지고 삶의 질이 높아진다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착각이다. 

 

하지만 좋은 가치를 위해 노동자의 희생이 당연시되는 문화는 분명 잘못된 것이다. 공동체라는 개념의 특성상 근무자가 '노동자'보다 '공동체 구성원'이라는 정체성을 더 강하게 가져야 한다는 암묵적 강요도 문제다. 학교에서는 지속적으로 청소년 노동 교육을 필수로 가르치고 있다. 올해부터는 아마도 내가 수업을 하게 될 것 같은데 이런 부분을 아이들과 어떻게 공유하고 이야기를 나눌지 걱정이다. 그냥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게 상책인 것 같다.

 

`

열정페이란 말은 꽤 오래 갈 것이다. 그리고 그런 몰상식한 일을 벌이는 누군가에게 분노를 표현하는 문화 역시 오래 갈 것 같다. 하지만 열정페이의 부조리함을 가장 크게 주장하는 이들 중에는 가치페이를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경우가 많다. 좋은 가치는 좋은 노동 환경의 충분 조건이지만 좋은 노동환경은 좋은 가치의 필요 조건이다. 열정페이든 가치페이든 좋은 노동 환경 속에서 사회를 바꿀 혁신적인 아이디어와 사회를 이롭게 할 좋은 가치가 나올 수 있다. 사실 이 부분은  누구나 알고 있는 부분이다. 단지 실천하기가 어려울 뿐이다.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누가복음 6:42`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