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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야화/자전거도둑

보수와 진보

by 식인사과 2015. 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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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문득, 아니 꽤 오래전부터 난 보수주의자에 가깝다는 생각을 했다. 울타리 넘어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진보의 거침없는 도전과 무한한 상상력도 좋지만 그런 진보가 다시 이 세계로 돌아올 때 튼튼한 울타리의 역할을 해주는 보수의 건강한 원칙과 무심한 듯한 진지함이 내 기질에 맞기 때문이다.

 

보수와 진보는 서로 싸워야 할 적이 아니라 자연의 낮과 밤처럼 단지 역할이 다를 뿐이다. 옳고 그름, 좋음과 나쁨의 기준으로 편을 가를 수도 없다. 그냥 삶의 방식 중 하나이다. 흐르는 물에도 고인 물에도 물고기는 살지 못한다. 최적의 생태계는 새로운 물이 끊임없이 들어오고 빠져나가는 고인 웅덩이다.  

 

문제가 되는 이들은 코스프레를 하는 사람들이다. 그 중에서도 더욱 큰 문제가 되는 사람들은 진보 코스프레를 하는 사람들이다. 진보를 외치는 꽤 많은 사람들이 단지 진보를 '외친다'는 이유만으로 스스로 혁신적이고 세상의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하는, 정의로운 기사라고 착각을 한다. 이런 착각만 십년, 이십년 반복을 하면 수구가 되고 그러다가 꼴통이 된다. 보수에만 수구꼴통이 있는 것이 아니다. 진보에도 수구꼴통들이 많다.

 

진보와 보수를 타자화로만 생각할 필요도 없다. 한 개인의 삶 속에서도 진보와 보수는 섞여 있으며 우리는 그 안에서 원칙과 상상력을 기준으로 끊임없이 고민하고 선택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원칙이 중요할 때가 있고 상상력이 중요할 때가 있다. 보수주의자라고 해서 원칙만 선택하지 않고 진보주의자라고 해서 상상력만 선택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둘 사이의 균형이다. 상상과 원칙은 절대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다.

 

이런 기준에서 바라보면 대한민국의 보수와 진보는 상당히 왜곡되어 있다. 보수라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원칙을 지켜야 하는 기개가 있어야 하며 진보라면 울타리 너머 미지의 세계가 두려워도 과감하게 도전하는 호기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보수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은 모두 원칙을 어기면서 원칙을 지키는 사람들을 바보라고 비웃는 사람들이며 진보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은 메마른 이성으로 호기롭게 도전하려는 타인을 재단하기에만 바쁜 사람들이다. 둘다 수구꼴통이 맞다. 

 

보수에게는 삶을 억압하지 않는 원칙이, 진보에게는 원칙을 뛰어넘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상상을 무시하는 보수는 지루하고 원칙을 존중하지 않는 진보는 산만하다. 삶에 있어서 지루하고 산만한 것만큼 의미없는 것도 없다. 난 재밌게 살고 싶다. (플립보드 보수와진보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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