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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관객/불완전한사서들

책여행, 책을 읽다

by 식인사과 2018. 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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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집 근처에 있는 도립도서관을 뺀질나게 드나들었다. 책이 좋았다기보다는 돈이 없어서였는데 단돈 500원으로 국수를 사먹을 수 있는 도서관은 그 당시 나에게 적은 돈으로 이용할 수 있는 최고의 놀이터였다. 도서관에 있는 게 책 밖에 없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책들을 많이 봤다. 균형있는 독서 같은 개념은 없었고 그냥 그 당시 내가 관심 가지고 있는 분야에 대한 책들을 서가 바닥에 주저 앉아서 계속 읽었다. 읽다보니 책이 좋아졌고 이 때 생긴 책 읽는 습관은 이십대까지 지속되었다.


하지만 이십대 후반 본격적으로 현장에서 일을 하게 되면서 책 읽는 시간은 대폭 감소되었다. 마침 SNS 서비스가 급격하게 성장하면서 인터넷에서 볼 수 있는 유용하고 재미있는 글들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굳이' 책이 아니어도 좋은 텍스트를 여기저기서 볼 수 있었고 공유하기도 쉬워졌다. 한 때 전자책을 이용해보기도 했지만 휴대성을 제외하고는 큰 강점이 없었다. 사회 생활을 하면 책 읽는 시간이 줄어든다는 말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휴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상의 일을 잊고 느린 호흡으로 책에 푹 빠져들 시간을 만들기가 쉽지 않다.



그러다가 올해 솔숲의 멘토를 맡게 되었다. 솔숲 과정에서는 봄에 책을 주제로 학년여행을 가는데 얼마전 양평에 있는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로 여행을 다녀왔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학생들과 내가 청소년 시절에 다녔던 도립도서관에도 가고 교보문고, 알라딘 서점에도 함께 갔다. 나의 십대 시절에 드나들던 도서관 공간에 지금의 십대 친구들과 함께 가는 경험은 묘하게 설렜다. 몇 번의 리모델링으로 도서관 구조는 많이 변했지만 어떤 공간에 내가 어떤 모습으로 있었는지 '그냥' 기억이 났다.


학생들과 함께 정한 공통도서 5권과 개인도서 5권을 들고 소나기마을로 떠났다. 그리고 책을 읽었다. 여행을 끝내고 나니 빠르고 짧은 글을 읽는데 익숙한 지금 이 시대의 청소년 친구들에게 책여행은 다소 괴롭게 느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오랜만에 책을 몰입해서 읽을 수 있어서 즐거웠던 여행이었다. 여행 때 읽은 책에 대해 가볍게 서평을 썼다. 군대에 있을 때 책마을이라는 인트라넷 동아리에서 있던 책결산이라는 문화인데 오랜만에 다시 하니 이것 역시도 재미있었다. 나이가 드니 확실히 느린 호흡으로 접할 수 있는 매체가 점점 더 좋아지는 것 같다. 책을 또 읽어야겠다.





#1 엄마는 페미니스트 | 치아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여혐, 미투 등 사회적 이슈를 접하며 페미니스트에 관련된 많은 칼럼과 글을 읽었지만 책으로 본 것은 처음이다. 분량이 짧지만 작가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메시지가 있다. 여성과 남성의 삶에 있어서 나이지리아와 대한민국이 이렇게 비슷한 맥락이 있다는 것이 놀랍다. 진심이 담긴 친절한 작가의 이야기를 들으며 불편함과 상쾌함을 동시에 느낀다. 나는 여전히 여성의 삶을 모른다. (물론 나라의 특성 때문에 맥락이 다른 부분도 있다.)





#2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오랜만에 다시 보는 릴케의 편지. 십여년이 지난 지금 봐도 여전히 난해하고 어렵지만 그가 삶 속에서 추구했던 고독의 깊이를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삶 깊숙이 들어오는 요즘 시대에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인간다움’은 아마도 절대적 고독이 아닐까. 고독 속에서 피어나는 내면의 시린 빛 한 줄기가 그리워지는 요즘이다. 고독하자.





#3 세상을 바꾼 질문 | 권재원

질문의 깊이와 대답의 깊이가 동일하지 않다. 동서양의 내용을 골고루 다루려고 하지만 어쩐지 동양 대비 서양의 인문학적 지성을 높이 평가한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책을 다 읽고 덮은 후에도 이런 생각이 바뀌지 않는 것을 보면 내 느낌이 틀리지 않은 것 같다. 단호하지만 때로는 단조롭고 분명하지만 어쩐지 분리되어 있다. 그래도, 질문이 좋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읽을만한 책.





#4 82년생 김지영 | 조남주

소설의 첫 부분을 읽으면서 눈에 물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눈물이지만 눈물도 아닌 그 물기는 소설을 읽는 내내 지속되었다. 과장되지도 왜곡되지도 축소되지도 않은 다큐 같은 소설을 읽으며 다시 한번 여성의 삶을 돌아보게 되었다. 불편하기보다는 마음이 먹먹했고 깊은 공감이 갔다. 나와 같은 나이의 ‘김지영’씨의 삶을 보며 남성으로서의 내 삶도 함께 돌아보게 되었다. 이번에는 가슴이 뻑뻑했다.

다만 마지막 2016년 챕터는 이 소설의 가장 아쉬운 부분이다. 뜬금없이 나오는 40대 남성 정신과 의사의 시선은 ‘우리 모두의 김지영’을 작가의 김지영으로 축소시킨다. 작가의 의도는 짐작하지만 개연성 없는 반전과 대놓고 드러내는 교훈적 메시지는 소설의 공감을 떨어뜨린다. 어떻게 끝낼까 고민하다가 무리수를 둔 느낌이랄까.

그래도 좋았다. 무리수든 유리수든 이 사회의 불합리함을 꼬집으며 먹먹하고 뻑뻑한 감성을 동시에 주는 글을 접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10년 후에 다시 읽어봐야겠다. 그 때도 사회는 그대로일까.





#5 모래밭아이들 | 하이타니 겐지로

교실은 어떤 곳이어야 하는가에 대해 교사로서 많은 것을 돌아보게 한 소설이다. 옆나라 이야기지만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 만드는 불합리한 학교 교육 제도에 길들여지는 한국 청소년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다만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 주인공들의 대사 속에 너무 직접적으로 드러나서 소설로서는 조금 '시시'했다. ‘모범답안’을 거부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너무 모범적으로 해서 또 다른 ‘모범답안’을 보는 느낌이랄까. 때로는 좀 삐딱하게 봐야 기울어진 세상이 정상으로 보일 때도 있다. 





#6 은유의 힘 | 장석주

한권이 모두 은유로 되어 있는 시 같은 소설, 소설 같은 시. 은유의 힘을 이야기하기 위해 모든 내용을 은유로 설명하니 글을 내용을 받아들이는데 벅차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간간히 나의 머리를 강타하는 주옥 같은 은유가 나를 반긴다. 은유의 향연. 시는 상상을 먹고 은유로 토한다.

“한 알의 모대 속에 세계를 보며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 그대 손바닥 안에 무한을 쥐고 한 순간 속에 영원을 보라. - 윌리엄 블레이크 ‘순수의 전조’ 부분”

다만 미투 운동 이전에 출간된 책이기 때문에 글 곳곳에 고은 시인의 시에 대한 예찬이 많이 들어가 있다. 본의 아니게 불편하게 읽은 책. 작가는 지금쯤 후회하고 있을까. 





#7 우리는 침묵하지 않을 것이다 | 러셀 프리드먼

권력에 저항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나의 권리가 보장되는 상황에서 보장된 편한 생활을 포기하고 불합리한 권력에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나치에 항거하는 독일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자연스럽게 내 삶을 돌아본다.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 일상의 불의를 보며 무의식적으로 침묵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세상을 바꾸는 멋진 일을 하지 못해도 언젠가 뒤를 돌아볼 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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