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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야화/천개의공감

주말 아르바이트 풍경 | 20080824

by 식인사과 2017. 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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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싸이월드의 대안으로 이글루 블로그를 선택한 적이 있다. 싸이월드에 올린 글을 하나 둘씩 옮기려고 준비를 하다가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중간에 이사를 중지했다. 그렇게 몇 개의 글이 남아 있던 이글루에서 휴먼 계정 안내문이 날아왔다. 그래도 기록이니 그냥 두기로 했다가 어차피 싸이월드에 있는 글들이 대부분이라 이 참에 정리하기로 했다. (그러다가 이글루에만 쓴 글을 방금 날려 먹었다... ;;;) 


아래 글은 2008년 과천에 있는 뉴코아 백화점(이제는 이마트가 되어버린) 2층 푸마 매장에서 1년 간 주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들었던 생각을 옮긴 글이다. 과거의 글을 다시 읽은 것은 언제나 새롭다. 





01

주말 아르바이트로 매장에서 옷을 팔기 시작한지 어언 7개월- 사실 벌써 그만두려고 했었으나 가까운 동네에서 한다는 것과 나름 쏠쏠한 페이, 게다가 한적한 분위기라는 메리트가 겹치면서 아직까지 쉽게 그만두지 못하고 있다. 12시간동안 혼자 일하는 경우가 많아 간혹 그 하염없는 시간이 곤혹스러울 때가 있으나 사실 난 혼자있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라 하염없는 시간을 하염없이 농땡이 피우면서 재밌게 일하는 편이다.

 

탁 트인 공간이지만 사람이 별로 없어서 가끔은 매장 옷을 가지가지 입어보면서 패션쇼를 열기도 하고 진짜 사람이 없을 때면 매장 음악에 맞추어 춤도 춘다. (진짜? 응-)배고프면 근처 맥도날드에 가서 런치 세트 시켜먹고, 그러다가 멜랑꼴리해지면 이렇게 여기저기 클럽에 글도 남기고 심심해지면 다음만화세상에 가서 만화를 실컷 보다가 나온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일- 사람들이 오면 전투적으로 옷을 판다. 그게 내가 이 곳에서 일하는 이유니까.

 

옷을 팔다 보니 본의 아니게 사기를 치기도 하는데 유행에 더럽게 둔감하고 내 손으로 옷이란 것을 거의 사본적이 없는 내가 당연히 코디란 것 해본적도 없을 터- 그런 내게 손님들이 여기저기 옷을 집어들면 자동적으로 이런 말이 튀어나온다. "이런 식으로 코디해서 입으면 좋아요" 난 한 번도 코디해서 옷을 입어본적이 없으니 이 말은 분명 거짓말이며 게다가 돈까지 챙겼으니 사기인 것이 당연하다. 그래서 한 번은 그런 궁색한 상상을 해본 적도 있다. 사기나 쳐볼까-

 

02 

주변에 중,고등학교가 있어서 그런지 내가 일하는 매장에는 가족들 단위로 옷이나 가방을 사러 오는 경우가 많은데 이들이 옷 사는 풍경은 거의가 비슷비슷하다. 그리고 열에 아홉은 아이들의 취향과 부모들의 취향이 다르다. 대부분 아이들은 개성이 있고 눈에 튀는 것들을 좋아하고 부모님들은 무난하고 차분한 스타일을 좋아하지만 가끔은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그렇게 취향이 갈릴 때 부모들의 선택은 크게 두가지인데- 아이들의 취향에 맡기거나 또는 자신들의 취향을 강요하는 것이 그것이다. 지금까지 관찰한 근거로 봤을 때 아직은 후자의 경우가 대부분인데 그런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얼굴 표정에서부터 자신감이 없으며 분명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앞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기껏 모기 똥구멍만한 크기의 목소리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곤 한다. 

 

사실 이 부분은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다면 체험적으로 느낄 수 있는 부분이라 별로 대수로운 일도 아니다. 어린 시절 내 옆집에 살았던 개똥이나 앞집 순희나 그리고 나 역시, 사랑이라는 이름 하에 행해지는 각종 억압기제를 즐겁게 받아들이지 않었던가. 부모님께 순종하고 국가에 복종하는 것이 어른들이 자라나는 새싹들에게 바라는 가장 큰 꿈이니까.

 

각설하고- 어쨌든 재밌는 건 전자인 경우다. 아이들의 취향에 맡긴다는 말을 들으면 굉장히 민주적인 가정이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 당연한 순서겠지만 사실 '강요'라는 측면에서 보면 두 가지 경우가 별반 다르지 않다. 한마디로 전자의 경우는 아이들의 취향을 강요한다. "너 좋아하는 거 사!"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니가 좋으면 그만이지" - 대강 이런 식인데 민주적으로 강요하느냐 강압적으로 강요하느냐의 차이 아닌 차이가 있을 뿐 아이들의 생각들 존중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볼 때 둘 다 똑같다.


03

이래나 저래나 그래도 알콩달콩 재미나게 사는 가족들이 꽤 많다. 결혼은 미친 짓이라지만 이제 갓 돌이 지난 아기 신발 사러 온 젊은 부부들이나 중고생 자녀들을 앞에 두고 두런 취향 전쟁을 벌이는 중년 부부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냥 아무 이유 없이 부러울 때가 있다. 그런 내 마음을 가만히 살펴 보면 그냥 결혼이 하고 싶은 건지 그저 외로운 건지 마냥 그리운 건지 단지 연애를 하고 싶은 건지 상당히 알쏭달쏭해서 나조차도 알 수가 없는데 아마도 남자 나이 이십대 후반에 찾아오는 뻔하디 뻔한 청승이 아닐까 싶다.

 

차라리 청승이라면 낫지- 진짜 사람이 그리워지기 시작하면 큰일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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