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일하던 대안학교에서는 매년 1월이 되면 학생, 교사, 학부모, 졸업생이 모여서 교육토론회를 열었다. 3년 전인가, 학교운영위원회에 참여한 한 부모님이 교육과정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부모들의 의견을 더하고 싶다는 의견을 주셨는데 그렇게 할 바에는 차라리 학생들의 의견도 함께 넣자고 역제안을 해서 모두가 참여하는 토론회로 만들어버렸다.
학생들의 제안은 일 년 교육과정 안에서 충분히 수용하고 있었지만 평가와 계획의 과정에서 교사와 부모만 남았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이미 잘 알고 있었던 나는 전체 토론회로 기획함으로써 보다 생산적인 논의가 되기를 바랐다.
참여 주체가 많아지면서 한 주제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누기는 어려웠지만 한 주제에 대해 학생, 교사, 부모가 이렇게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토론회의 중요 성과였다. 반면 토론회 기획 주체에 따라 토론회의 방향과 내용의 질이 출렁거리는 것은 계속 남아있는 과제가 되었다.
학생들 사이에 갈등과 폭력의 문제의식이 생겨나면서 작년에는 이 주제로 토론을 진행했다. 토론 주제가 갈등으로 정해진 이유는 과거에 비해 갈등이 더 많아진 부분도 있고 잦은 갈등조차 견디지 못하는 학생들이 늘어난 이유도 있는 것 같다. 또는 학생들의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을 무척 어려워하는 교사나 부모의 부족함 때문일 수도 있다. 당시 교사회를 대표하여 발제 역할을 맡게 되었는데 주제의 민감성 때문에 글을 길게 썼지만 결국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딱 하나였다.
어떤 히어로가 나타나도 갈등을 한 방에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결국 우리 스스로 풀어야 합니다.
학교를 포함한 대부분의 청소년 기관에서 갈등과 폭력 상황은 가시적이든 비가시적이든 수시로 발생한다. 그리고 그런 상황을 목격한 어른들은 학생들과 갈등을 함께 해결하기보다는 각종 벌칙으로 갈등을 보이지 않게 눌러버린다.
어른들이라고 학생들이 밉고 갈등은 눌러버려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다른 방식으로 해결하고 싶어도 어딘가 모르게 왜곡되어 있는 갈등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불합리한 사회 제도 때문에 본인의 의지와 다르게 사회의 관성대로 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여기에 부족한 나의 글을 올리는 이유는 그런 상황 속에서 고민하고 힘들어하는 교사나 부모, 학생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갈등이 생기면 바로 로그아웃할 수 있는 온라인 생활에 익숙한 현대인들은 갈등을 무척 싫어한다. 갈등은 관계의 기본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갈등 없이 좋은 관계를 맺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런 관계는 없다. 좋은 관계는 갈등이 없는 관계가 아니라 갈등이 생겨도 서로의 이해와 배려를 바탕으로 잘 풀 수 있는 관계다.
사람은 누구나 관계를 맺으며 살아갑니다. 오늘의 주된 토론 주제인 ‘갈등’ 역시 관계 속에서 발생합니다. 역으로 말하면 관계가 없다면 갈등은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갈등은 우리가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꼭 풀어야 할 필수부가결한 삶의 과제입니다.
○○○○에서는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규칙보다는 문화를 먼저 강조하고 개인적인 접근보다는 공동체적 접근을 통해 다 함께 논의하고 결정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갈등과 폭력에 대해서는 복잡한 이해관계와 2차 피해 발생을 우려하여 공개적인 논의 방식보다 당사자 중심 면담 방식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학생토론팀의 발제를 들으며 당사자는 아니지만 그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학생들에 대한 지원이 부족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깊게 공감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올해 학생회와 교사회가 함께 논의해서 대안을 함께 마련하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갈등의 한자 뜻을 아시나요? (질문) 칡나무 갈(葛), 등나무 등(藤)입니다. 칡과 등나무가 얽히듯이 다양한 사회적 관계 속에서 일이나 상황이 복잡하게 얽히면서 각기 다른 방향을 지닌 힘들이 충돌하는 상태를 우리는 갈등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갈등은 사람이 존재하는 모든 공간에서 발생합니다. 특히 굵직한 감정의 덩어리들이 세세하게 분리되며 다양한 감정의 결을 새롭게 알아가고 있는 청소년 친구들이 모여 있는 공간에서는 매분, 매 순간 갈등이 발생합니다. 그런 갈등이 쌓이고 쌓여 때로는 폭력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런 상황을 마주했을 때 어떤 삶의 태도를 가질 수 있느냐입니다. 폭력 상황이 발생하면 당사자뿐만 아니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입습니다. 외면하고 싶기도 하고 벌을 주고 빨리 해결하고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갈등과 폭력 상황 속에 놓여 있는 사람들의 고민과 마음을 타자화시키지 말고 나의 문제로 인식하며 서로의 아픔을 공감하고 나누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제도와 규칙이 그렇듯이 제도가 만들어진 당시에는 서로가 이해하고 있는 정도의 폭이 다르지 않아서 긴 대화를 하지 않아도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는데 큰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경험의 폭이 달라지면서 곡해되어 엉뚱하게 해석이 되거나 적용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우선 ‘108배’로 상징되는 학교 폭력 발생 시 적용하고 있는 문제 해결 프로그램에 대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108배 제도는 ‘물리적 폭력’ 또는 ‘도난’이 발생했을 시 발동되는 회복적 대화 프로그램으로 2009년에 처음 도입되었습니다. 108배는 상징적인 용어일 뿐 108배와 함께 진행이 되는 4주간의 회복적 대화가 주요 프로그램입니다.
‘도난’의 경우 상황 발생 후 도난이라는 것이 판명이 되면 4층에 모두 모여 상황을 공유하고 물건이 돌아오는 시간을 가지게 됩니다. 일정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면 교사, 학생 전체가 다함께 108배를 진행합니다. 하지만 물건이 돌아오지 않는 경우 108배를 하게 되었을 때 물건을 도난당한 친구가 오히려 부담을 가지게 되는 점, 도난인지 분실인지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모든 친구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모는 분위기, 그 당시 도난이라고 판단했지만 나중에 분실이라고 밝혀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도난에 대한 108배 적용 규칙은 자연스럽게 사문화되었습니다.
‘물리적 폭력’에 대한 108배 규정은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대의 변화만큼 이 규정도 적용 방법과 내용이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초기에는 폭력 상황이 발생하면 다같이 4층에 모여서 당사자를 앞에 두고 상황 공유 및 질문과 조언을 해주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전체 모임이 끝나면 당사자들과 함께 4주 동안 대화 프로그램을 밝으며 108배를 진행했는데 이 당시까지는 당사자들을 가해자, 피해자의 구도로 나누지 않고 모든 프로그램에 함께 참여했습니다. 이 과정이 끝나면 다시 관계를 맺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최근 이 방식의 실효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분들이 있지만 학교 초기부터 지금까지 돌아보면 이 과정을 통해 자기반성을 하고 행동 변화를 통해 관계 회복을 한 경우는 많습니다.
그리고 108배 과정을 몇 번 겪은 학생들과 그것을 옆에서 본 학생들 모두 이 과정이 힘들다는 것을 경험하면서 갈등이 발생해도 물리적 행위를 자제하려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는데, 예방적 차원의 긍정적인 효과가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4층 전체 모임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이 갈등 해소에 도움이 주기보다 정서상 2차 피해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전체 모임을 바로 열지 않고 사안별로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하지 않은 경우 상황 공유는 학년 모임 또는 개별 상담을 통해 진행하고 필요할 경우 학년회의 또는 전체회의에서 내용을 공유하기도 했습니다.
108배를 하는데 있어서도 때리고 맞은 친구가 함께 하는 과정에 대한 문제의식이 생기면서 명백하게 한쪽이 때렸다고 판단이 되는 경우 때린 친구만 108배 과정을 진행하고 대화 프로그램은 당사자들 모두 함께 진행했습니다.
대화 프로그램의 기간도 조정이 되었습니다. 기존에는 조건 없이 4주 기간을 적용했지만 사안의 크기에 따라 1-4주로 조정이 되었고 대화 프로그램은 주당 평균 15시간 내외를 배치하여 담임교사, 대표교사, 통합교사 중심으로 대화 프로그램을 진행하였습니다. 하지만 진행 방식은 개별 멘토 재량이 아닌 모든 교사회가 함께 모여 논의하고 결정해서 진행을 했고 이 방식은 초창기부터 변함이 없습니다.
현재는 4층 전체 모임은 사실상 거의 하지 않아서 사문화되었습니다. 108배의 경우도 종교적 차원 또는 개인적 사유로 거부하는 친구들이 생기면서 108배 대신 학생에게 맞는 프로그램을 찾아서 대화 프로그램과 함께 진행하고 있습니다.
대화 프로그램은 적용 과정에서 당사자 중심으로 푸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필요시 학년회의, 전체회의를 통해 풀어가는 과정을 함께 밟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갈등과 폭력 상황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일방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개인과 개인, 개인과 그룹, 그룹과 그룹 사이에서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에 필요한 경우 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풀어가는 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다만 오픈해서 이야기할 경우 더 큰 어려움이 발생할 수 있다고 판단이 되면 개별 면담으로만 진행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갈등 상황이 발생했을 때 학생들은 이야기에 참여하는 것 자체에 대해 힘들어합니다. 상황의 어려움에 따라 이야기에 참여하며 상처를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실제로 내 일이 아닌 듯 무관심한 친구들도 있습니다. 자기 시간을 뺏기는 것 같다며 당사자들에 대한 원망 아닌 원망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갈등의 유형이 다양하듯 갈등을 해석하고 반응하는 모습도 다양합니다.
하지만 이런 모습 자체를 순간순간 평가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이런 과정이 쌓이고 쌓여 어느 순간 갈등과 폭력에 대해 우리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갈등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어떤 갈등이 폭력으로 이어질까요. 분명한 것은 갈등이 발생하는 요인과 상황은 굉장히 입체적이라는 것입니다. 실험실에서 실험을 하듯 단 하나의 변수만으로 갈등이 생기거나 폭력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 동안의 경험으로 볼 때 갈등의 요인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언어, 시선, 말투’입니다. 물리적 폭력은 앞의 세 가지 요소가 다양한 상황 속에서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때 발생하는 결과이지 원인이 아닙니다.
‘혐오표현’이라는 언어폭력이 청소년 공간을 넘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에서도 그 동안 관계를 맺으며 장난스럽게 쓰던 용어들이 다양한 상황 속에서 상처를 주는 말이 되는 경우가 많았고 매년 전체회의 또는 학생 공청회 등을 통해 정돈하는 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대 변화에 따라 ‘혐오표현’은 청소년 언어문화 속에서 계속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이 지속적으로 고민하고 해결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갈등의 주된 요인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시선과 말투입니다. 외부로 드러나는 거친 표현들은 드러나는 순간 직접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어서 더 큰 문제로 이어지지 않지만 상대방을 무시하거나 모욕하는 시선, 표현은 거칠지 않지만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좋지 않은 말투는 갈등을 깊어지게 하고 결국 폭력으로 이어집니다. 학교에서 발생하는 물리적 폭력 상황도 대부분 이런 상황 속에서 발생합니다. 더 어려운 점은 이런 요인은 겉으로 잘 드러나는 부분들이 아니라서 당사자와 직접적인 대화를 하기도 어렵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런 행위를 하는 당사자들은 본인 스스로 그런 행위를 한다는 것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갈등은 인간관계를 맺으며 발생하는 필수 불가결한 부분입니다. 갈등 없는 관계는 존재할 수 없고 갈등을 잘 해결했을 때 우리는 더욱 좋은 인간관계는 맺을 수 있습니다. 갈등 해결을 위한 학교 차원의 시스템적 접근과 개인 차원의 내면적 접근에 대해 구분해서 논의가 필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어떤 히어로가 나타나도 갈등을 한 방에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결국 우리 스스로 풀어야 합니다.
얽힌 실타래를 푸는 방법으로 무엇이 있을까요? (질문) 인내심을 가지고 천천히 풀어가는 것과 끊어내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가 또 다른 갈등의 자리가 아닌 인내심을 가지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회복하는 자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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