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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야화/자전거도둑

촛불과 '촛불' (20080608)

by 식인사과 2013.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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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대선의 국정원 개입에 의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촛불시위가 현재 서울광장에서 매일매일 벌어지고 있지만 신문이나 언론은 기사 하나 내놓지 않는다. 부정 선거를 덮기 위해 박근혜를 필두로 한 새누리당은 아직도 바쁘다. 아마 새누리당 관계자 중 한 번이라도 제대로 읽었다면 공개하지 못했을 NLL 회의록을 만천하에 공개하는가 하면 그걸로 부족하니 뜬금없이 전두환씨에 대한 압수수색을 감행했다. 전두환씨의 불법 재산 소유 여부는 이미 오래전 부터 증명이 되었지만 지금 이 시점에 터트린 이유는 대한민국 초딩이라도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뿐이랴- 최근에는 NLL 대화록 실종이 되었다며 대화록 내용에 대한 진실 공방은 사라지고 실종에 초점이 맞춰지며 국회가 어수선해지고 있다. 새누리당의 완벽한 물타기 성공! 이런 걸 보면 이명박보다는 박근혜가 확실히 한 수 위라는 것이 분명해진 것 같다. 완벽한 언론 통제, 법 위에 존재하는 무법 정치, 그러면서도 자신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대통령이라고 자랑스럽게 외치는 뻔뻔함- 머릿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대단한 멘탈인 것은 확실하다.

 

아무튼 밑의 글은 2008년 광우병 파동으로 벌어진 촛불 집회를 보면서 든 생각을 정리한 글이다. 물론 나도 집회에 나가서 물대포를 맞아가며 시위에 참여했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다. 그래도 든 생각은 사람들이 참 '이중적'이라는 것이었다. 내 목숨만큼 타인의 목숨이 소중하다고 생각했다면 과연 1만명 모이는 것에 그쳤을까- 최근의 촛불 집회가 연일 이어지며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지만  참여 인원의 한계를 가지는 이유가 난 비슷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부정선거가 일어났지만 지금 당장 내게 피해 오는 것이 없다면 사람들은 모이지 않을 것이다. 청소년 교육을 하고 있는 나로서는 결국 이 문제의 근본은 청소년기의 윤리 교육의 부재로 본다. 감수성과 정체성이 정립되기 시작하는 시기에 죽어라 남을 앞서는 교육만을 받은 친구들에게 타인의 생명이 얼마나 소중하게 다가오겠는가. 에고- 글을 쓰면서도 답답하네 ㅠ.ㅠ 아무튼, 즐감!

 

 

 

 촛불과 '촛불'

 

촛불집회가 한달여 가까이 지속되고 있다. 항상 '냄비근성 한민족'이라고 비아냥 받던 대한민국 시민들이 이번엔 정말 '뿔났'나보다. 각종 플랜카드에는 MB정부의 졸속 정책들을 비난하는 구호들이 난무하고 그와 더불어 사람들은 하나 둘씩 촛불을 들기 시작해이제는 십 만명이 넘는 시민들이 시청광장으로 날마다 모여들고 있다. 인터넷의 확산으로 전국 시위가 가능해진 지금 서울을 기점으로 MB정부의 표밭이었던 경상도의 대구, 부산을 지나 이젠 촛불도 부족해 횃불까지 등장한 전라도 광주까지, 게다가 이제는 해외에거주하고 있는 코리언 디아스포라들까지도 미약해 보이던 촛불의 기운이 일파만파 퍼지고 있는 것이다.

 

사실 난 촛불이 시청 앞 광장에 처음 등장했을 때, 그리고 그것이 장기전으로 이어지며 대규모 집회로 이어지는 것을 보며 그다지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오히려 집회의 성격에 대해 의심스럽기까지 했는데, 그것은 촛불을 들고 나온 사람들의 양심적 동기 속에숨어 있는 이중적인 도덕을 느꼈기 때문이다. 생명? 중요하다. 게다가 그것이 나의 생명이라면 염라대왕의 멱살을 쥐어서라도 지키고 싶은 게 바로 이 순간 현재의 삶이 아니었던가. 게다가 우리들의 삶을 정말 윤택하게 만들어줄 수 있을 것이라 서민들을 속여왔던 MB정부는 역시나 전문가라면 충분히 예견가능했던 고유가에 고환율 정책으로 맞서며 서민들의 휜 허리를 동강 내고 있으며, 지못미의 미덕은 커녕 이제는 도무지 품질에 믿음이 가지 않는 미국산 소고기로 '죽음의 밥상'을 손수 만들어주려고 '애쓰고' 있고, 구렁이 담 넘어가듯 추진하고 있는 의료보험 민영화를 통해 맹장 수술 40만원 시대에서 천만원 시대로 나아가기 위한 각종 교두보를마련하고 있다.

 

분명 생명은 소중한 것이다. 그것은 서울의 온 동네를 촛불의 바다로 만들어버린 사람들의 공통된 마음일 것이다. 소고기 정책으로파급된 여러가지 담론들, 그것이 괴담이든 진담이든 이제는 소고기를 먹는 모든 사람들에게 나도 모르게 죽을 수도 있다는 인식이결국 사람들을 시청 앞으로 이끌었다. 이제는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인 것이 아니라 사람들은 그저 살고 싶어서 촛불을 들고 모였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안고 있는 것처럼 불안한 일이 또 있을까. 버라이어티쇼에서야 장난감 폭탄이 터지면 깜짝 놀라고 끝이겠지만 MB정부의 소고기 폭탄은 터지는 순간 비명횡사하는 꼴이니 당연히 두려울 수밖에. 자- 그러면 사람들이 삼삼오오 짝을 이루어 시청 앞에 모이는 이유는 보다 분명해졌다. 민주주의를 위해서? 아니면 더 나아가 최장집이 꺼낸 논의처럼 '민주주의의 민주화'를 위해서? 그런 고고하고 숭고한 이유라면 과거에 효순이 미순이 추모 집회나, 평택 미군 기지 반대 집회 때 그랬던 것처럼 기껏해야 며칠동안 몇 천명 모이고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또는 이랜드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처럼 아무도 촛불을 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조금 솔직해지자. 사람들은 그저 죽기 싫을 뿐이다.       

 

문명의 폭탄을 직접 경험했던 하이데거야 죽음만이 비루한 일상에서 고귀한 삶으로 복귀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했다지만 사실 죽음이란 것은 쉽게 경험할 수 있는 삶의 영역은 분명 아니다. (죽어볼래요?) 죽는 것, 나의 현재가 돌이킬 수 없는 망각의 강을 건너 현실의 끈을 놓아 버린다는 것은, 현실이 아무리 명박하더라도 우리들에게는 분명 두렵고 무서운 일이다. 옛말에 개똥밭에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소고기 문제를 대할 때 죽기 싫어서 목소리를 높인다는 것 자체를 비난할 생각은 없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며 전혀 이기적인 일도 아니다. 죽기 싫은 건 인간이라는 종을 떠나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들이 두려워할 본능적인 감정일테니까.

 

다만 아쉬운 것은 지금의 촛불 집회의 모습에서, 나의 생명이 소중한 것처럼 모두의 생명이 똑같이 소중하다는 인식의 확장을 볼 수 없다는 데에 있다. 그것은 이기적인 모습은 아니나 분명 '이중적'이다. 그것은 마치 남의 애가 어떻게 되든 말든 내 애만 잘 크면 된다는 요즘 신세대 엄마들의 철없는 이중성과도 비슷하다. 만약 시민들이 나의 생명만큼 타인의 생명도 똑같이 소중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면 과거 우루과이라우드를 통해 쌀개방을 반대하기 위해 농민들이 몸을 던져 한국 쌀시장을 사수할 때도, 효순이미순이의 부모님들이 아이들의 영정앞에서 피눈물을 흘릴 때도, 이랜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전경의 구둣발에 밟혀 응급실에 실려갈때도 촛불을 들었어야 했다. 


어찌됐든 그렇게 십만이 넘는 인파가 이명박의 졸속 정책에 '분노'하고 청와대 내각의 퇴진 및 대통령 본인의 퇴진을 요구하며시청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인구 천만 서울 시민의 1%가 한 자리에 모인 것이다. 1%? 글쎄- 이것은 조금 이상하다. 내 생명을 가지고 장난치는데 기껏 1%라니. 일개 축구대회인 2002년 월드컵 때 예선전인 폴라든전만 해도 서울 한복판에 50만명가까운 사람이 모였으며 독일과 붙은 4강전에는 서울 시민의 70%인 700만 인파가 대한민국 수도의 중심부에서 인산인해를 이루며 한국팀을 응원했다. 그 당시 월드컵이 우리들에게 주었던 다양한 의미들이 대단했다고 하더라도 '1'과 '70'이라는 숫자는 뭔가아이러니한 것이 사실이다. 박지성의 역전골이 내가 죽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그런 이유라면 나 역시 요즘 한창 주가를 올리고있는 원더걸스의 소희씨한테 '소 핫'하게 내 목숨을 올인할 수 있다.

 

집회 인원이 아직까지 1% 언저리에서 머물고 있는 이유는 미친 소고기를 들여오든 민영화를 하든 말든 태어나서 '수입산'이라는것은 들어본 적도 없는 천상의 삶을 살고 있는 '선민' 재벌들을 필두로, 이제는 수입산 소고기 '따위'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는'新중산층' 부르주아들과 그들의 서자이며 동시에 시민의 대다수를 이루고 있는 소부르주아들이 어제나 저제나 미국산 소고기가 자기와는 전혀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자신은 죽지 않으니까. 이들에게 돈이 없어서 '값싸고 질좋은' 미국산 소고기를 실컷 먹을 수 있는 가난한 서민들의 생명이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결국 결론은 똑같다. 죽기 싫어 집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이나 별 관심없어 집회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이나 '타자'의 생명이란 별로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 똑같은 동기에 의해 집회 참여여부가 갈리는 이런 역설적인 상황이 다소 우습지만 어찌 되었든 전자덕분에 서울 시민의 1%가 광장에 모였으며 후자 덕분에 99%의 서울 시민이 광장에 모이지 않았다.


나는 근본적으로 촛불 집회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동기야 어찌했든 난 촛불집회가 가져올 다양한 사회적 영향력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편이다. 벌써부터 MB정부가 땀 뻘뻘흘리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가. 대한민국 정부는 시민을 조금 무서워할필요가 있다. 다만 앞으로 시위 문화가 더 발전하기 위해서, 그리고 말 그대로 형식적이고 절차적 민주주의에 만족했던 대한민국 시민들이 '민주주의의 민주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지금 이 '사태'에 대한 보다 포괄적이면서도 심도있는 논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앞으로 다가올 대한민국 사회 필요한 연대는 바로 '타자'와의 연대라는 다소 진부하고 매우 뻔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도 결국 이런 연유에 기인한다. 그 이후에야 우리는 비로서 나의 촛불이 아닌 모두의 '촛불'을 들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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